“우리가 해야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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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views실패에서 회복을 경험하다. 1. 우리는 모두 실패자다. 2.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이미 알고 있다. 3. 그래도 용서받는다.
Notes
Transcript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마태복음 26:69-75.
여러분, 한동안 잊고 쓰지 않았던 말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 기분이 어떻습니까? 마치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 같이 반갑고 설레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자필이력서’라는 단어가 그러했습니다. ‘자필이력서’ 말 그대로 ‘직접 손으로 쓴 이력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온라인화된 시대에 이력서를 손으로 쓴다는 것이 참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전해주는 떨림과 설레이는 기분만으로도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처음 이력서라는 것을 작성했을 때 그랬던거 같아요. 이력서 용지에다 한글 이름, 한자 이름, 생년월일, 뭐 그런 것들을 꾹꾹 눌러썼고, 학력이나 경력을 쓰는 란에는.. 쓸 내용이 없어서 대학재학중 한 줄을 썼습니다. 그래도 이 간단한 이력서를 쓰는 것이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던지, 몇 장을 다시 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제 이력서에는 대학 졸업외에 여러가지 것들이 한 줄 한 줄 채워졌습니다.
저는 목사 역시도 그렇게 한줄 한줄 채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고 목회자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제가 처음 쓴 이력서에는 대학교 재학중이라는 것 외에는 쓸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경력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러한 것들의 행간에는 무수한 실수와 실패와 낙심과 좌절의 흔적들이 분명 숨어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그런 것들을 제 이력서에 쓰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이력서를 잘 쓰는 제일 원칙은 자기를 가장 돋보이게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실수의 흔적들을 일부러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기록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숨기고 싶은 실패였고, 또한 이 사건을 기록한 마태 역시도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이 불편한 실패의 이야기를 통해 실패와 용서, 그리고 회복의 의미를 함께 나누어 보기를 원합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모두 실패자라는 사실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 날밤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건이 있기 전에 모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셨어요. 그 자리에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3절과 35절입니다.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자신있게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제자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기록한 마태의 관점에서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마태 자신도 그런 배신자였다는 거에요.
마태가 베드로의 실패의 기록을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마태 자신도 똑같은 실패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 역시도 실패자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창세기 6:5에서는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라고, 예레미야 17:9에서도 세상에 가장 부패하고 썪은 것은 우리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로마서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성경은 우리 인생들이 근본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에도 실패하였고 오늘도 실패하고 또 내일도 실패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조금더 나아가 볼까요?
베드로가 자신이 실패하였음을 깨달은 후에 어떻게 합니까?
75절입니다.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깊은 절망가운데 절규하였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원망, 절망 등에서 비롯된 눈물을 멈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너무나 힘들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의 모습은 다름아닌 자신이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배반하고 도망쳤던 바로 그 제자가 자신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를 향하여 “심히 통곡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너 역시 배신자잖아.. 베드로는 이렇게나 부끄러워하였는데, 너는 이 사실이 부끄럽지 않니? 너는 주님을 배신한 존재야! 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태의 외침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배신자에요. 실패한 죄인입니다. 통곡하여 울어야 하는 그런 존재들이에요.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그런 소망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가슴을 찢으면서 후회하며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존재에요. 소망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5:4에서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어요.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였다”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쏟아내는 통곡은 분명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그날 밤의 실패가 나의 것임을 깨닫고 통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배신자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울어야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마 26:21)고,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3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베드로에게도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4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이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이에요.
요한은 이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요 13: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리고 14:1절입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통곡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던 이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는 갈릴리에 가서 그물을 던지고 있어요. 그물을 던지만 물고기는 잡을 수 없어요. 빈 그물만 던지고 있는 것이 마치 베드로의 텅빈 심정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요? 헛짓거리 하고 있는 거지요. 죄책감이 주는 굴레에서 회복되지 않은채로 여전히 통곡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더라는 것이지요.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을 정말 열심히 잘 믿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나요? 바리새인들처럼 지독한 완고함으로 믿음 약한 이들에게 가르치고 지적질을 하지는 않았나요. 그때에는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냐는 거지요.
그런데 알고보니 스스로 잘 믿는다던 내가 오히려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존재였던 거에요. 참 믿음이라고, 교회를 지키고 세운다고 여기면서 큰 소리쳤는데, 알고보니 나를 믿고 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믿음이라던 것이 나의 아집과 독선임을 알게 되었다면은요? 주님은 헐벗고 배고프고 연약하여 무시당하고 고통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돌보라고 가르쳤는데,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더 움켜지고 또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나요? 다름 아닌 실패한 존재라는 거에요. 여러분은 실패한 베드로가 아니십니까?
우리 역시도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숨은 실체를 마주 대하게 될 때에 크게 낙심할꺼에요. 어쩌면 베드로보다 더 깊은 절망에 빠져 두려워 떨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런 내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구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냐고 자책할 수도 있겠지요.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써 모른척하고 이전보다 더 완고하게, 다른 이들을 탓하면서 또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더 세상에 취해서 더 크게 웃으면서 살아가려고 할 수도 있어요. 절망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인 것이지요. 불쌍하고 한심한 인생이에요.
그렇게 실패한 인생으로 끝나버릴 존재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어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무슨 말인가요?
실패하여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소망도 없는 인생이기에 마음에 근심하는 것이 당연한게 아니겠어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네가 나를 모른다 하였다는거 잘 알고 있어. 너는 나를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잖아. 나를 섬긴다 하면서 네 배만 불렸잖아. 네 실체를 이제야 알았다고. 네가 그렇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는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래도 너무 자책하지 말아. 힘들어 하지 말아. 절망하지 말아라. 나를 믿어.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단다. 네가 어떤 악한 일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때문에 내가 너를 모른다 하지 않겠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겠어요.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는 여기에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줍니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기 때문이에요. 누가는 베드로가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아요. ‘돌이킨 후에’라는 표현과 같이 분명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연약한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위해서, 오히려 그 실패로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까 하여, 아니면 더 신앙이라는 너울을 뒤집어쓴 채로 괴물처럼 살아갈까봐 기도하고 또 기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도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움직이셨습니다.
마태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에요. 베드로의 실패가 우리 인생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친히 걸어나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의 수치스러운 죄악때문에 나를 향한 구원의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고 실패할 모든 것을 주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같은 우리의 죄악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행간입니다. 나는 배신자라는 실패의 민낮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악때문에 누구보다 더 아파하고 통곡하고 고통스러워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나를 위한 당신의 위대한 발걸음을 옮기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진리에요. 우리의 실패는 반드시 용서함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 21:15-19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세요. 그 자리에서 베드로에게 똑같은 세 번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죽으셨어요. 베드로의 모든 실패와 수치와 모욕과 절망의 그 모든 것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어요. 그것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이지요. 십자가의 죽음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미 주님은 베드로를,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주님,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것은 그 순간 예수님이 듣고 싶은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듣고 싶으셨던 것은 그분을 위해 죽겠다는 맹세가 아니었고,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는 외침도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교회도 세우고, 병도 고치고 선교하면서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결단도 아니었어요.
주님이 듣고 싶으셨던 것은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이 한마디셨던 것이지요. 이 한마디가 실패하여 통곡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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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그들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 사랑을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나를 찾아온 주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분께 너무나도 부끄럽지만, 자격없지만,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떨리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듣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한마디에요.
마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의 소리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하여 수치스러움에 몸서리치며 울부짖었던 그 날 밤의 고통을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고통하였는지를 잊지말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나의 배신때문에 죽으셨다고,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곡하라는 것이지요. 어디에서요..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실패의 자리에 십자가로, 주 에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돌아가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저 “주님 사랑합니다”는 한마디 고백입니다.